지킬 박사와 하이드
지킬 박사와 하이드
경제학에서 인간은 이기적이고 합리적이라고 가정한다. 소위 말하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그러나 현실의 인간이 그렇게 단일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항상 합리적으로 행동하는가? 일상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모순적인 행동을 하고 또 그것을 제3자가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이유로 정당하는 것을 종종 본다. 인간의 모순적 성격에 대해서는 프로이드가 언급한 바 있다. 그와는 다르지만, 흔히 공포, 괴기영화에서나 등장하던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통찰이 있다. 그 구절을 옮겨 적는다. 프로이드는 1900년에 <<꿈의 해석>>을, 스트븐슨은 1886년에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출간하였다.
Robert Louis Stevenson(2008). 지킬 박사와 하이드 (박찬원 역). 서울:펭귄클래식코리아 (원서출판: 1886. 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 and Other Tales of Terror)
나는 18xx년에 태어났다.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고 그밖애도 훌륭한 신체를 물려받았으며 천성적으로 부지런했다. 학식있고 훌륭한 동료들로부터 존경 받는 잉을 기뻐했다. 따라서 당연히 명예롭고 빛나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의 가장 큰 단점은 쾌락을 탐하는 성향이었다. 쾌락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만, 그건 자긍심으로 대중들 앞에서 철저하게 근엄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오만한 욕망을 가진 내게 쾌락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욕망을 감추었다. 그런데 되돌아볼 수 있는 세월이 되어 스스로를 돌아보자 세상에서의 내 성취와 지위를 평가해보니, 아미 나는 상당히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부조리를 오히려 과시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스스로 새운 고귀한 가치관에 따라 판단했도 거의 병적인 수치심으로 내 부조리를 감추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나 자신을 형성해 왔으며, 내안에서 인간의 이중성을 나누고 결합시키는 선과 악이라는 두 영역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갚은 고랑을 파서 철저하게 분리시킨 것은, 내가 타락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지향하는 바가 매우 엄격했기 때문이다.
종교에 뿌리를 둔 가장 심오한 고뇌의 원천인 선과 악이라는 이중성, 이 가혹한 삶의 법칙에 다해 나는 깊이, 집념을 가지고 천착하게 되었다. 내가 뿌리깊이 이중적이라고 해서 위선적인가 하면 그건 전혀 아니다. 나의 두 가지 모습 모두 진실한 것이었다. 자제심을 버리고 부끄러운 일에 뛰어드는 나 역시, 환한 태양 아래 지식의 증진 혹은 슬픔과 고통의 경감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나와 다르지않은 나 자신이었다. 전체적으로 신비하고 초월적인 방향으로 진행되던 내 연구에 성과가 있어, 내 인간동료들이 끊임없이 겪어야 했던 이 전쟁에 대한 커다란 희망의 서광을 비추었다. 그리하여 나는 하루하루 내 지성의 두 줄기인 도덕과 짓ㄱ으로부터 출발하여 점차 진실에 가까이 가게 되었다. 그 진실의 일부를 발견했기에 나는 그렇게 무시무시한 파멸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 진실이란, 인간은 진정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이다. 내가 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 지식으로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선상에서 혹자는 나를 뒤따를 것이고 혹자는 나를 앞지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내가 감히 추측건대 인간은 결국 여러 개의 모순되면서도 각기 독립적인 인자들이 모인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내 경우, 내 삶의 본성이 한 방향으로만, 오직 한 방향으만 절대적으로 전진했다. 그것은 도덕적인 측면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나는 나란 인간 속에서 철저하고 근본적인 인간의 이중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내 의식 속에는 서로 갈등하고 있는 두 개의 본성이 있으며, 비록 내가 그 중 어느 한 쪽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내 양쪽 모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찍이 내 과학적 발견을 통해 두 본성을 분리하는 기적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도 전에도 나는 그러한 몽상을 즐기곤했다. 나는 생각했다. 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에 담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날이 가능하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다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없이 학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그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느낄 것이며, 더 이상 악질적인 악마가 행하는 불명예 탓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들 모순되는 한쌍이 함께 묶였다는 것은, 고뇌하는 의식이라는 자궁 속에서 이렇게 극과 극인싸웅이가 계속 갈등하며 지내야 하는 것은 인류가 받은 저주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 둘을 분리할 수 있을까?(Stevenson, 2008:105~7)